학교기사 고신을 빛낸 이달의 인물(6) - 손양원, 설립자 총무로서 충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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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을 빛낸 이달의 인물(6) - 손양원, 설립자 총무로서 충성하다
“손양원 목사님은 고려신학교의 설립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가?”
“손 목사님은 과연 고려신학교의 설립자나 총무로서의 제 역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일부에서는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고 손 목사님의 역할과 기여는 미미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일반적으로 학교의 설립자라는 말을 쓸 때 그 설립 취지에 동조하고 후원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포함한다. 이 두 가지 관점에서 손양원 목사님은 분명히 고려신학교 설립자였다. 설립 취지에서도, 경제적 후원에서도 그는 설립자의 역할을 충실히 다했다. 허순길 교수의 기록에 따르면 한상동 목사님은 1946년 5월 20일 진해에서 주남선, 박윤선, 손양원 등과 함께 신학교 설립에 대한 합의를 통해 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비록 손 목사님이 그 자리에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옥고를 치른 손 목사님이 고려신학교의 설립 취지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를 기성회원으로 포함시켰던 것이다.
한편 설립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주에서 모시고 온 박형룡 교수가 온 지 얼마지 않아 여러 학생을 데리고 서울로 떠나버렸을 때, 제2대 교장이었던 박윤선 교수는 당시 부흥회 강사로 전국적인 명성을 가진 손양원 목사님을 학교의 총무로 세웠다. 어떤 이들은 교회가 애양원이었으므로 실제로 학교 운영은 한상동 목사님이 부산에서 전부 담당하셨으며 그에 대한 손 목사님의 역할은 미미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실제로 손양원 목사님이 학교 총무로서 제 역할을 한 것이 거의 없는 형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손 목사님은 한상동 목사님을 비롯하여 고려신학교와 관련된 교회나 성도들과 깊은 교류가 있었고, 한부선 선교사의 5만 호 축호 전도의 부흥전도집회 강사로, 3천 명 집회 인도 후에는 애양원교회 교우들과 고려신학교 선생과 학생들의 기도에 대한 감사를 언급하기도 했다. 또 다른 일기에서 손 목사님은 고려파의 초창기 목회자였던 이약신 목사님이 자신에게 설교를 강권하시는 바람에 그날 아침 또다시 설교를 자신이 하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신대학교 기독교육학과 교수로 재직 중 소천한 한기태 교수는 1948년경 자신이 중학생 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가 학교에서 귀가하는 도중 심한 열로 쓰러졌을 때, 당시 큰아버지 한상동 목사님이 목회하던 초량교회 부흥회 강사로 오신 손 목사님이 아픈 자신을 위해 직접 기도해 주셨으며, 그 결과 자신의 증상이 빨리 완쾌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손 목사님과 한 목사님이 지속적이고 호의적으로 교제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두 사람은 분명히 신학교 총무로서의 임무와 역할에 대해서도 서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심군식 목사의 전기에 따르면 손 목사님이 부흥회 인도 외에도 자주 부산으로 내려가서 고려신학교 총무직을 수행하려 하였으며 고려신학교의 육성을 위해 힘을 기울였다고 말한다.
초창기에 손양원 목사님은 애양원 교회 성도들과 함께, 아마도 작정 헌금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하는데, 여러 사람의 이름으로 고려신학교에 100원에서 2,000원에 이르는 후원금을 보냈다. 교수 한 사람의 월급이 1만 원이었던 당시에 손 목사님은 개인적으로 3,000원을 헌금한 적도 있었다. 그 외에도 고려신학교의 정기간행물이었던 『파수군』에 순교 전 네 차례, 순교 후 네 차례의 설교가 실리는 등 고려신학교의 신학과 신앙의 궤에 동참하였다. 비록 매일 출근할 수는 없는 총무직이라 하더라도-그것은 한상동 목사님이나 박윤선 교수님이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손 목사님은 자신의 위치에서 그 직무를 결코 방치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은 말보다 행동이 그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총무라는 직함이 아니라 고려신학교를 위한 손양원 목사님의 입체적 실천이 오히려 설립자와 총무로서의 진정성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오병세 교수와의 대화에서 나삼진 목사는 손 목사님이 고려신학교 이사회의 총무로서 실무적 책임을 지고 있었으며, 또한 전국교회에서 홍보대사의 역할을 했다고 설명하였다
무엇보다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손양원 목사님의 장례식이었다. 손 목사님의 장례식은 순교 후 15일 만에 엄수되었다. 이렇게 늦었던 것은 당시 여수 지역의 치안이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고려신학교의 인사들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손 목사님의 순교 소식이 알려진 후 노회 관계자가 아닌 박윤선 교수, 오종덕 목사 및 학생과 성도 30여명이 부산에서 여수까지 뱃길로 가서 장례식 사회, 설교, 특별찬송을 불렀던 것이다. 정양순 사모님과 유가족들은 손 목사님의 신앙과 신학이 고려신학교와 일치함을 알았기에 그들에게 장례식을 의뢰하였고, 이후 고려파의 신앙을 잇기 위해 손 목사님과 신앙을 달리하는 애양원 교회를 떠나 1952년 성암교회를 설립하였다.
서울의 모 신학대학원에서 “순교자 손양원 석좌교수”라는 타이틀을 본 적이 있다. 이제는 주소를 바로 잡아야 하겠다.
하재성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상담학)
※ 위 연재내용은 고신언론사와의 공동프로젝트 추진 업무 협약에 따라 기독교보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시리즈>
◈고신을 빛낸 이달의 인물(1) -박윤선 목사,고신 신학의 토대를 놓다
◈고신을 빛낸 이달의 인물(2) -한부선선교사,고신선교의 초석을 놓다
◈고신을 빛낸 이달의 인물(3) -김영진 임옥희 선교사, 고신에서 파송한 첫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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